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73
다음은 드물게 강변에 자리한 사찰, 신륵사 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연못을 바라보며 신성한 사람이 설 곳이라 일러주었고
이후 그곳에 절을 세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안되었다고 합니다.
원효가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승천한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보물 제 180호인 조사당, 석탑과 승탑 등 다수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인 나옹선사가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나옹은 1376년
또한 한 때는 세종대왕의 능침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보은사'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드물게 강변에 자리해, 한 폭의 그림같은 모습입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신륵사 한 번 방문해보세요!
다음은 세종대왕릉입니다.
세종대왕릉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어 한글과 세종대왕 관련된 전시물을
관람하실 수 있어요
*입장료
만 25세~만64세 500원
만 24세 청소년 무료
만 65세 이상 어르신 무료
지역주민 250원
외국인(만 19세~64세) 500원
장애인, 유공자 무료
*주차장
주차장에 무료주차 가능합니다! 넓고 쾌적한 편입니다.



이제 세종대왕릉으로 걸어가볼까요?



저 멀리 보이는 세종대왕릉의 모습

주변은 바리케이트로 접근할 수 없게 되어있었어요.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이곳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모셨다가, 예종 1년에 이곳 여주로 이장하였습니다.
왜 여주로 이장하였을까요?
세종에게 풍수지리 전문가 최양선이 이곳을 흉지(凶地)라 지적하며,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손들이 줄고 망할 징조— 라고 보고했으며
세종은 합리적 자세로 의견을 수용하여 관련 관청에 검토 지시를 내리고 풍수 제언을 충성으로 받아들여 일부 공사 등을 결정하기도 했는데요.
세종 사후 몇 년간 문종, 단종, 의경세자 등 직계 후손들이 연이어 단명하고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능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그제야 돌기 시작하였고
예종 원년, 왕명으로 헌릉을 파보니 물에 잠겨 썩은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수의조차 썩지 않고, 무덤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지관 안효례가 여주의 터를 점지하였는데요
그러나 그 곳은 세조 때 우의정이었던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묘였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명당 터로서 자손이 관직을 세습하여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예종은 이인손의 아들 이극배(우의정)을 불러 "왕릉을 위해 묘지를 양보해달라"고 설득하며 이주가 이루어집니다.
여주 이장 이후 왕실에는 더이상 극심한 조난과 단명 소식이 줄었지만, 민간 설화와 지방 기록에나 언급되었고 조선실록 등의 사료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